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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평연 자료실

폭스바겐의 태동은 포르쉐와 함께였다.

by 객원ㄱI자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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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니더작센 주 볼프스부르크(Wolfsburg)에 본사를 둔 자동차 제조 회사이다.

Volkswagen은 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이다. 알파벳 W(영어 발음: 더블유)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 등에서는 '/v/' 발음으로 읽힌다. 따라서 폭스와겐이 아니라 폭스바겐이라고 부른다. Volk (인민) + -s- (합성어 중간에 삽입되는 연결 요소) + Wagen (자동차). 원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독일어 발음 /ˈfɔlksˌvaːɡn̩/에 근거하여 폴크스바겐이라고 써야 하지만, 폭스바겐사의 대한민국 공식 법인명이 '아우디 폭스바겐코리아 주식회사'이며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기 때문에 폭스바겐으로 통칭한다.


폭스바겐은 포르쉐를 만든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포르셰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었고, 실제로 회사는 페르디난트의 아들 페리 포르셰가 창업했다. 그래서 폭스바겐과 포르셰는 사실상 한 몸이다. 시간 순서를 따지고 보면 포르셰 쪽이 형이다.


나치당은 1933년 집권 후에, 중요 지지기반이던 노동자 계층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한다. 대공황의 여파로 발생한 대규모 실업자를 흡수할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이들이 저렴한 비용에 다양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공공 복지 프로그램도 가동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치당의 노동자 기관인 독일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 약칭 DAF) 산하에 공공 레저 기관으로 1933년에 "Kraft durch Freude (환희를 통한 활력, 약칭 KdF)"를 설립한다. KdF는 저소득 노동자 가정들도 소정의 적립금만 내면 국가의 보조금을 더해 각종 공연 및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가난으로 레저 활동을 꿈꿀 수 없던 노동자 계층에서 이러한 정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34년에 벌써 230만 명이 가입하여 KdF가 제공하는 휴가 프로그램을 즐겼다. KdF는 이에 각종 리조트를 확보하고 여객선을 건조해서 다양한 레저 패키지를 구성하는 등, 사업을 확장한다.


히틀러는 한편으로 독일 노동자들이 독일에서 만든 저렴한 자가용 승용차을 소유 하여 유럽을 자유롭게 오가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집권하자마자 공공 토목사업으로 아우토반 건설에 착수했고, 이어 1934년에는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에게 노동자도 돈을 모아 충분히 살 수 있는 1,000 라이히스 마르크짜리 국민차를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민간 자동차 업체들은 고급 차량 중심의 라인업만을 갖고 있어서, 이 가격에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업체가 없었다. 이에 이 프로젝트는 독일노동전선이 떠맡아 거액의 공공 보조금을 투입한 별도의 기업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폭스바겐 사 태동의 계기이며, 오늘날 폭스바겐 사에서도 1934년을 회사 창립의 기점으로 잡고 있다. 포르셰 박사는 결국 히틀러의 요구 조건인 어른 2명과 어린이 3명이 탑승 가능하며, 최고속도 시속 100㎞ 이상에 연비도 7L/100㎞를 만족하면서도 구조도 최대한 단순화한 Typ 60 프로토타입 모델을 1935년에 설계해낸다. 이 설계에 의한 시험차량은 1936년에 제작되어 1937년까지 약 3백만㎞의 주행 시험을 거치며 계속 수정되었다.


히틀러와 독일노동자전선은 이를 양산하기로 확정하고, 1938년 5월에 니더작센 주의 팔러스레벤에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여 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이것이 폭스바겐 사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이때 기공식에서 히틀러는 이 신차의 이름을 "KdF-Wagen"으로 명명하고, 이듬해부터 차량을 양산해 KdF 가입 노동자들에게 공급하겠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KdF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차량 공급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이를 구입할 수 있는 적립통장을 만들도록 권유했다. 이 KdF-Wagen은 차량 가격이 990 라이히스 마르크(취등록 비, 보험료 등 부대비용 제외)로 책정되었으며, 적립통장 1권은 5 라이히스 마르크 짜리 쿠폰 50장(총 250 라이히스 마르크 어치)을 붙이게 구성되어 있었다. 노동자는 매달 여력이 되는 만큼 쿠폰을 구입해 적립통장 4권에 쿠폰을 모두 붙여 제출하면 KdF-Wagen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장이 완공되기 시작한 1939년에 곧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실제 노동자들에게 공급된 차량은 210대 남짓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이 그간 적립한 돈도 사실상 독일의 전쟁비용으로 흡수되었다. 개전 이후 폭스바겐 공장은 즉시 군수공장으로 전용되어 퀴벨바겐, 슈 빔 바겐과 같은 군용차를 생산한다. 대전 기간 동안 퀴벨 바겐은 약 52,000대, 슈 빔 바겐은 약 14,000대가 양산된다.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연합군 산하의 관리에 들어가면서, 폭스바겐은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포르셰 박사는 포드에 회사를 매각하려 했으나, 포드의 거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포르셰 박사는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아들 페리가 회사를 지켜야 했다.

 

이 와중에 공장 관할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넘어갔고, 공장 설비의 처분권도 영국이 갖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소련이 그랬듯이 공장 설비를 다 뜯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로서는 천만 다행으로 당시 영국 자동차 업체들은 폭스바겐 생산 설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영국 육군 장교였던 이반 허스트(Ivan Hirst) 대령은 전후 폐허 위에서 생계가 막막해진 독일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남아 있는 생산 설비에 독일 노동자들을 다시 모아 독일 주둔 영국군에게 납품할 차량 생산을 재개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당초 민수용 차량 설계대로 폭스바겐 1형(Volkswagen Typ 1) 생산이 재개되었다.

 

1945년에는 1,785대가 생산되었고, 점차 부품 공급망이 정상화되면서 1946년 3월에는 월간 1,000대 생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복구되었다. 이들은 1946년까지는 거의 전량 영국군에게 납품되었으며, 독일의 민간 경제가 서서히 복구되면서 일반 독일 시민들에게도 공급되기 시작해 1947년에는 9,000대 이상이 민간 시장에 판매되었다.

이 폭스바겐 1형은 점점 개량되며 해외시장에도 진출했고, 폭스바겐 비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미국 등에서 대 히트를 치게 된다. 1971년에 연간 130만 대가 생산된 것을 정점으로, 2003년 7월 멕시코 푸에블라 공장에서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무려 2,153만 대가 출고되었다. 이러한 폭스바겐 비틀의 대박을 등에 업고 폭스바겐은 완전하게 부흥하게 된다. 그 뒤 공전의 초히트작인 전륜구동 해치백 폭스바겐 골프를 내면서 세계 최강자 반열에 든다.

이후 포르쉐에서는 비틀의 플랫폼을 가져와서 개구리 모양의 356이라는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오리지널 비틀도 수평대향식(복서) 엔진을 달았고 356도 수평대향식 엔진을 달았으니, 완벽하게 궤를 같이하는 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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